지명유래

양양읍의 유래

양양읍은 군 소재지로 이조 태종 6년에 府內面이라고 하였다가 고종 甲午에 郡內面으로 개칭하고 1917년에 部南面과 位山面을 편입하여 襄陽面이 되었다. 四通五達로 교통은 극히 편리하나 남대천의 백여리 수원은 항상 시가의 홍수난을 염려하게 되므로 1932년에 남대천 제방을 쌓았는데 1936년 병자년 여름의 대홍수로 파괴되고 인축 家財의 손실이 막심하였다. 1938년에 재차 견고한 축방을 하여 수해의 우려는 없게 되었다.

海廟殘碑는 당시의 향화를 추억하고 영혈감천은 도승의 신방을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산의 雲雨는 仙夢을 비호하고 東海蒼松은 역사 푸른 풍운이며 德耆古坊의 옛 마을 鳴吠가 상훤하고 동명폐허 외로운 老碣 옛 비석이 창태에 사모친채 桑海浩劫 그 옛날을 슬퍼할뿐 풍조연혁에 시대만이 변천한 것이다. 양양이란 중국의 호북성 한수연안에 있는 양양과 이 고장의 지형과 자연미가 비슷하다 하여 지어진 지명으로 1416년부터 명명하였다.

군행리(軍餉里)

옛 명칭은 문안(門內) 조선조 당시 양양부내의 성을 방위하기 위한 군인의 급식지였음을 表徵하는 리명이다. 부성주위에는 동서남북의 4문이 있었는데 남문과 서문안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문안이라고 불리었다. 그리고 고려 고종 8년(1221) 양주방어사때 군량을 쌓았으므로 군행리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문안을 병합하여 군행리라 하였다.

성내리(城內里)

구명은 성안말, 산말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형태는 없으나 양양정읍 당시 城內라 명칭하였는데 그후 오래됨에 따라 발음이 "산말"로 변칭되었다. 고려때 양주성 축성 당시 이 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4대문을 내고 축성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구교리(舊校里)

향교골, 미륵골(彌勒洞)이다. 향교골 유래는 이곳에 향교가 있던곳이므로 향교골이라고 부르고, "미륵골"은 별 유래는 없으나 이골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옛날 사람들이 이 바위를 미륵바위라고 불렀으므로 이곳을 미륵골이라고 불렀다.

연창리(連昌里)

상운역이 이곳으로 이전함에 따라 큰 창고를 연이어 건립한 연유로 이름하였다. 서쪽 능선을 구명 "대미소 고댕이"라고 하는데 유래는 산등에 대나무가 울창하게 있었고 그 산밑에는 소가 있었으므로 "대미소"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송암리(松岩里)

마을 북쪽 작은 산봉우리 위에 솔바우(松岩)가 있어 이름하였다. 구명 "건너말" 유래는 동리의 집단가호에서 분리되어 범재산이라는 산아래에 민가가 있었는데 본동으로서는 건너편이 된다. 그래서 통속명이 된것이며 범재고개는 산형국이 虎形으로되어 靑谷里로 통하는 고개가 되었고 따라서 범재고개라고 부른다.

내곡리(奈谷里)

고려초에 형성된 上古부락이다. 奈木(고야나무)이 많았으므로 멋질(내곡리)이라고도 부른다. 和谷山麓에 민가가 있어 본 동리의 건너편에 있다하여 건너마을이라고 부르고 月谷洞 넘어에 있는 부락을 달래넘어마을이라고도 한다. 조선조 숙종시 山頂에 사직단이 있었으므로 사직단이라고 하고 금수봉은 송죽이 울창하여 그 경치가 좋고 시인들의 음영처로 제공되었으며 장고봉은 옛날부터 正月元宵에 玩月하는 高峯이다.
文成峴은 향교 이전후 文士와 才士들의 왕래가 빈번하였으므로 일명 향교 고개라고도 하고 磨石峴은 맷돌을 만드는 돌을 많이 파냈다고 하여 명명한것이며 手老洞由來는 옛날 山과 골에 삼림이 무성하여 토지가 비옥하고 그 농작물에 흉풍이 없다하여 모로동이라고 하였다 한다.

청곡리(靑谷里)

옛날 구한국시대에 고을 수령들이 본동리를 통과할때는 이곳에서 하마하여 설악산 신령을 향하여 한번 배례를 하였으므로 배일(拜一)이라고 하였는데 그후 1913년에 산이 좋은 골이라 하여 청곡리라 칭하였으며 동리 인구가 증가되고 지역이 광대함으로 해서 "새터마을"까지를 1구로 하고 동쪽인 "비석거리"를 2구로 구분하게 되었다.

포월리(浦月里)

신라, 고려시대에 마을앞에 호수가 있었는데 달이 뜨면 유달리 아름다운 빛이 났으므로 이 마을을 포월리라고 칭하였다. 본래 양양군 위산면(位山面) 지역으로 양짓말 앞에 호수가 있었는데 달밤에 보는 경치가 아름다워서 명명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촌, 하촌을 병합하여 포월리라하고 군내면에 편입되었다가 그후 양양읍에 다시 편입됨.

조산리(造山里)

이 동리 앞날의 발전을 위하여 동리 주위에 산을 만들어야 한다하여 1657년 선조들이 인력으로 만든 연고로 조산리라 칭하였다. 본디 해변에다 조선조에 동해묘를 창건하고 이를 숭배해 오다가 말엽에 훼철하였다. 島坪에 대한 유래는 1667년에 산이 붕괴되어 섬이 되었던 것이 1867년에 대홍수로 인하여 매몰되어 현재는 전답으로 化하였으므로 과거의 섬을 추상하여 섬들(島坪)이라고도 한다.

사천리(仕川里)

옛날에는 渭川이라 칭하였는데 그후 1907년부터 仕川里로 개칭하였다. 옛날 이곳에 성황당이 있었는데 원이 말을 타고 통과하다가 말굽이 떨어지지 않으므로 원이 하마하여 원을 업어넘기고 간곳이라고하여 원골이라고 한다. 이 동리를 仕川이라고 부르게 된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이 골에 定住하러오는 사람은 대부분이 벼슬을 하려는 사람이 모여 살기에 "벼슬仕" "내川"이라 부르게 되었다. 보통 "사레(사내)"라고 한다.

감곡리(甘谷里)

조선조 以來로 位山面의 松里 또는 甘洞이라고도 칭하였다. 1466년 세조대왕이 낙산사에 行幸時 洞泉을 길어다 마시고 물맛이 달다하여 甘泉고이라고 하였다가 1894년 以後 甘谷里로 개칭하였다.

남문리(南門里)

양주성 남문 밖을 지칭한 지명으로 양양시내의 가구수가 점증됨에 따라 서쪽부터 동쪽으로 1,2,3,4리로 구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래 양양군 군내면(郡內面) 지역으로서 양양읍성의 남문이 있을때는 "남문거리"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변경에 따라 남문리라 하였다.

화일리(禾日里)

산곡협촌이나 관개가 편리하고 風水寒의 三災를 모르는 곳으로서 토질은 박한 편이나 사질양토로서 결실만은 실패가 없어서 연년이 풍년이 들어 穗谷(수일-쉬일)이라고 하였다가 그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禾日이라 하였고 옛날 이곳에 물방아가 있었다하여 "수침동" 또는 "물방아골"이라고도 하였다.

거마리(車馬里)

거마리 동리 앞으로 흐르는 小川을 옛날에는 금계천이라 하였는데 그 이름을 따서 금계리(金溪里)라 하였다. 1857년경에 황진사(석만)가 거마리로 개칭하였는데 그 뜻을 동구에 능용거하고 동리에 능치거라하여 동구는 병구처럼 협착(狹窄)하나 동네는 광활하다는 것이다. 그후 1916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새잇말(間村), 단짓골 아양골을 병합하여 군북(양양)면에 편입되었다.

임천리(林泉里)

옛날에는 鹿門이라 하였다. 이조중엽에 향교가 구교리로부터 이전되어 왔으므로 향교 직사가 거주한 관계로 마을이 이룩되어 향교골이라고 한다. 동리 뒷산명은 石城山이라고 하며 이 산에 석성당이라고 하는 제당이 있는데 매년정월에 본동의 년중 행운을 기원하는 축원제를 지내고 있다. 石城山 東麓下에는 下馬碑가 있었는데 향교복구와 동시에 향교전방 입구에 이전하였음. 下馬碑는 "大小人 員皆下馬"이다. 金文正公尙憲이 襄陽府使 권진을 보낼때에 다시 글을 지어 주었다.
習家池觀己生, 江漢風流 祗虛事 / 峴香殘碑閣畿春 門下見姓龐人이 마을은 무성한 숲에 덮여 있고 항상 맑은 물이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임천이라 한 것은 조선조 숙종때 회양부사 조종저(趙宗著)가 임천으로 고쳐 詩를 읊은데서 연유되었다 한다.

기정리(基丁里)

본래 位山面의 관할이였으나 191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基里와 丁巽里를 통합하여 리명 첫 자를 따서 基丁里라고 칭하였다. 고려 당시 거리에 암자가 있었던 관계로 좋은 골이라 하여 터골이라고 불려지고 있으며 丁巽은 洞里 뒷산이 丁字形으로 되고 손방에 있다하여 丁巽이라 칭한다.

서문리(西門里)

舊名은 마을이 대부분 들판이였으므로 "버덩말"이라고 하였다. 그후 襄陽府城 西門밖에 있다하여 西門里로 개칭하였다. 옛날 동리 중심으로 묵개라는 溪川이 있었으며 내곡리 사직단 산록 양지쪽이라 하여 양지마을이라고 한다.

월리(月里)

양양부에서 물 건너편이 되므로 "越里"리고 하였는데 그후 일제때 "越"의 음을 "月"로 오칭하였다고 한다. 또한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마을의 산이 半月形으로 생겼다고 하여 "月"字로 1909년 개칭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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